Balancing the Ideological Pendulum in National Heritage: Cultural Politics in the Management of Japanese Colonial Heritage
일본 경제 호황기가 지속되었던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는 주로 상대적 ‘우월함’의 상징처럼 사용되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이 일본의 소니, 도요타, 파나소닉 같은 대기업들과 경쟁이 되지 않던 시절에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일본XX이 미워도 배울건 배워야지” 라던가, 과거사와 관련해서 “일본 아니면 한국이 이 만큼 발전했겠어?”와 같은 망언(?)을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과거 일본에 대해 느꼈던 막연한 ‘패배감’이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일본은 더 이상 우리가 배워야 하는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협력을 통해 공생해야 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여기는 성숙한 시민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일제의 위안부 강제징용이나 독도 영유권 같은 민감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입니다. 3.1. 운동 100 주년이었던 2019년은 그어느 때보다 ‘반일 감정’이 최고조로 달했던 해였습니다. 그 해 3월 초 아베정부가 단행한 반도체 핵심 부품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 조치로 인해 국민은 분노했고 폭발된 ‘반일(反日) 감정’은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들불처럼 한반도 전역으로 번진 ‘일본 불매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대를 초월한 한국 국민들의 공분의 배경에는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의 나라 일본에 대한 분노와 ‘피해 의식’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고, 이런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일종의 집단 동조 현상은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의해 한반도에 조성되었던 건조물, 흔히 근대문화유산을 두고 오가는 보존과 철거에 관한 치열한 논쟁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오늘은 조선총독부 건물과 서대문 형무소에 차별적으로 적용된 보존 정책을 통해 일제 식민지 유산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가해 권력의 상징, 조선총독부의 해체 (Site of Victimizers)
"To lose all that is familiar-the destruction of one’s environment-can mean a disorientating exile from the memories they have invoked. It is the threat of a loss to one’s collective identity and the secure continuity of those identities (even if, in reality, identity is always shifting over time.)" -David Lowenthal, 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reprint, 1999)
"환경의 파괴로 인해 친숙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대상에 관해) 해 왔던 기억들에서 '혼란스러운 고립'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정체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이지만, 파괴로 인한 친숙한 것의 상실은 집단 정체성의 상실과 그런 정체성의 안전한 연속성에 대한 위협이다." -데이비드 로웬 달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위치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20년대에 차례로 건립된 경성부청, 경성역, 조선신궁 등과 함께 서울의 식민지 경관을 ‘완성’하는 핵심 건축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0년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경복궁 근정문 앞뜰에 있던 모든 건물을 철거한 뒤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일본이 한 일 합방(Japan-Korea Treaty of 1910) 이후 6년 만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설한 목적은 조선의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것과 경복궁이라는 조선 권력의 상징적 지역에 총독부를 세움으로써 통치국가의 위상을 공식화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신축부지가 결정되자, 총독부 회계국은 베를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上海, Shanghai), 칭다오(靑島, Qingdao) 등에서 일하다가 일본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 중이던 독일 출신의 건축가 게오르크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를 총독부 고문으로 위촉해 청사의 기초설계를 의뢰하게 됩니다. 참고로 그는 일본에서 고베의 오리엔탈 호텔을 비롯하여 요코하마, 도쿄의 외국인 저택과 오사카 미쓰이 은행 등의 설계했으며, 조선에서는 원구단 부지에 있는 철도호텔 (현 조선호텔)의 기본 설계를 담당하는 등 한국, 중국, 일본을 오가며 건축활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야욕과 미래의 청사진을 고스란히 품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6년 6월 15일에 착공하여 1926년까지 무려 1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당초 5개년 계획이었다가 다시 8년으로 늘었지만, 고종의 승하와 3․1 만세운동 등으로 인해 공사가 더 늦춰져 10년이나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인 1만여 평 (약 3만 3000㎡) 에 지상지상 4층 지하 1층으로 조성된 청사는 거대한 서양식 석조 콘크리트 건물로 권력을 상징하는 중앙 돔이 설치된 전형적인 식민지풍의 제국주의 건축 양식이 적용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문제가 꾸준히 논의됐지만,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던 한국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 미군정 청사로 사용하면서 ‘캐피털 홀(capital hall)’로 불렀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가 사용하면서 이 영문식 명칭을 한글로 번역해 ‘중앙청(中央廳)’으로 이름 짓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제헌국회가 열리고, 대한민국 정부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잠시 북한군 청사로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내부가 훼손되었던 것을 그대로 방치하다가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인 보수공사 후 과천으로 정부청사가 이전했던 1983년까지 20년 동안 정부 중앙청사로 사용했고, 이후 1986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비록 박물관의 용도였지만 일제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국민적 정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일부 언론에서는 총독부 청사가 국보 문화재를 보관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국가적 자존심’, ‘민족성 회복’을 언급하며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잇따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국민들 사이에 반일 감정이 고조되던 1990년 10월, 경복궁 복원계획에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이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문제가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과 국민들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그 해 광복절에 총독부 건물 중암 돔의 첨탑을 끊어낸 뒤 다음 해 초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됩니다. 1995년 8월 15일 지붕 위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구 총독부 건물은 완공된 지 70년 만에, 해방 50년 만에 해체됨으로써 일제 강점기 시절 가해 권력의 상징이자 ‘누군가’에게는 불편했던 청사 건물은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동시에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와 제2대 국회의 의사당으로 쓰인 대한민국 독립의 명맥을 잇는 역사물인 중앙홀도, 우리나라가 해방됐을 때 가장 먼저 태극기를 올렸고, 특히 한국전쟁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갔던 한국 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수복한 감격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국립중앙박물관 앞 국기게양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현재는 해체 과정에서 잘린 첨탑과 일부 자재만 독립기념관의 ‘조선총독부 철거부재(部材) 전시공원’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소식이 알려지면서 해체 전에 청사를 보기 위해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 수가 크게 늘었다고도 하고, 일본 정부가 회수 비용을 모두 부담하는 조건으로 건물의 원형 그대로 이전해달라는 입장을 전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 확인은 어렵습니다. 다만 원형을 보존하여 회수하는 방법보다 철거하는 것이 훨씬 시간 소요가 적었고, 당시 위안부 문제로 반일감정이 고조하던 것과 김영삼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를 고려해 보았을 때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고자 하는 문민정부의 강경한 입장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의 ‘이전 (relocation)’ 후 보존이라는 방안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통제’과 ‘억압’의 공간에서 애국 교육의 산실로 부활한 서대문형무소 (Site of Victim)
"Every act of recognition alters survivals from the past. Simply to appreciate or protect a relic, let alone to embellish or imitate it, affects its form or our impressions. Just as selective recall skews memory and subjectivity shapes historical insight, so manipulating antiquities refashions their appearance and meaning. Interaction with a heritage continually alters its nature and context, whether by choice or by chance."
-Eric Hobsbawm and Terence Ranger (ed.), The Invention of Tra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인식의 모든 행위는 과거로부터 살아남는 것들을 바꾼다. 단순히 유물을 감상하거나 보호한다는 것은 그것을 꾸미거나 모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형태나 우리의 인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선택적인 회상이 기억과 주관성을 왜곡시키듯이, 오래된 것들을 조작하는 것은 그것들의 겉모습과 의미를 바꾸게 된다. 유산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선택이든 우연이든 그 본질과 맥락을 끊임없이 바꾼다."
-에릭 홉스 바움 / 테렌스 랑거, 전통의 개발 (캠브리지 대학출판부, 2000)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1987년 의왕시로 이전될 때까지 일제를 비롯한 다양한 지배층의 통제와 억압의 공간으로 상징되어 온 장소입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종료된 후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조약(Treaty of Kanghwa, 1905)’을 맺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이것을 주도한 통감부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고, 1907년 12월 13일에 통감부의 압박을 받은 대한제국이 감옥 관제(監獄官制)를 공포하면서 1907년 12월 27일에 ‘경성감옥서(京城監獄署)’가 종로에 들어섰습니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통감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많은 의병이 수감되었으며, 일제는 ‘경성감옥’을 서대문으로 확장 이전하게 됩니다.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수용인원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1912년 9월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경성감옥’을 건설하게 되고, 서대문 현저동에 있었던 ‘경성감옥’의 이름을 ‘서대문 감옥(西大門監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족대표 33인을 이끌었던 손병희와 천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을 포함한 3,075명이 구속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소위 ‘사상범’들을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여러 감옥에 수감하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5월 5일 ‘서대문 감옥’의 명칭을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변경하면서 늘어가는 수감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조치로 1924년경까지 옥사의 증축과 부속시설들의 신축을 진행하게 됩니다. 1931년 10월 ‘서대문형무소’ 동남쪽에 약 4,400 m²(1,320평), 2층 규모의 감옥이 건설되고, 1935년 5월에는 ‘사상범’ 전용 감옥인 ‘구치감’이 완공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총 50여 동의 건물,건물, 외곽 높이 4미터의 담장과 10미터의 감시탑, 붉은 조적과 견고한 콘크리트 담장으로 구성된 대규모 근대적 수용시설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해방 이후에도 ‘서대문형무소’는 명칭 변경 없이 그대로 불리다가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 내 이념 대립으로 인해 독재 및 군사정권에 맞선 인사들이 이곳에 수감됩니다. 이후에도 ‘서울교도소 (1961년 12월 23일)’, ‘서울구치소 (1967년 7월 7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과 연관된 많은 인사들이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1970년대부터 서울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본격적인 도시 개발이 시작되면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됩니다.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되면서 전두환 군사정부는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인정받은 11개 동을 제외하고 12개 옥사 가운데 원형 옥사를 포함한 8개 옥사옥사 및 격벽장, 공장, 교도관 숙소, 취사장 등을 모두 철거했고, 이후 보존 결정을 내린 11개 동 중 김구, 강우규,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렀던 제10, 제11, 제12사 감옥 건물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대문구는 국고보조금 747억 원을 들여들여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된 서대문형무소 최초 도면을 기준으로 2020년까지 총 3단계에 걸쳐 복원을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1992년 ‘서대문 독립공원’ 조성에 이어 1998년 11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는 보안과 청사, 중앙사, 제9·10·11·12 옥사, 공작사, 한센 병사, 사형장, 유관순 지하감옥, 망루와 담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다양한 전시관과 체험학습을 통해 관람객에게 일제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사라진 가해의 공간, 보존된 피해의 장소, 그리고 잊혀진 해방 이후의 역사
“In the case of colonial heritage, the notion must also be revised that ‘colonial’ is something of minor importance and something to be embarrassed, ashamed or angry about. Not because these notions are invalid, but because they affect our evaluation and hinder a fair comparison with works conceived and realized outside the colonies.”
-P.K.M.van Roosmalen, In the “Changing Views on Colonial Heritage”
“식민지 시절에 구축된 유산의 경우, ‘식민지’라는 개념이 사소한 것이고, 난감하고, 창피하거나 화를 낼 만한 것이라는 개념도 수정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무효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식민지 밖에서 구상되고 실현된 (연구) 작업과의 공정한 비교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스 말렌, 식민지에 구축된 유산에 대한 관점의 전환
조선총독부 건물이 사라지고 서대문형무소가 복원된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족적 결단’으로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과 상처들은 얼마나 치유되었을까요? 이후 몇 번의 정권이 바뀌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강제 징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여전히 독도 영유권 문제로 한국 정부와 끊임없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정권과 해방 이후 독재정권이 그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서대문형무소’라는 감옥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또 그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적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역시 일제가 사용한 19년의 세월보다 이승만 정권 이래 한국 정부가 사용한 시간이 훨씬 더 오래된 역사자원으로 건립에서 철거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한국전쟁과 군부정권 등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의 기억을 담고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역사 자산에 대한 해석에서 일체의 왜곡 없이 사실을 기록하고(Collection), 세심한 연구와 합리적인 해석을 하는 것(Analysis),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적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 (Evaluation)은 역사 보존학의 핵심입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동일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가해’의 장소는 지워야 할 낙인으로, ‘피해’의 장소는 보존하고 남기려 했던 이중적 가치평가를 통한 선택적 보존행위는 과거사를 부정하고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의 과거사의 갈등이 당시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정치적 어젠다와 교묘하게 얽히면서 해체의 과정을 거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과 그 깊은 감정의 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존되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현재까지 활용되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의 보존 정책은 어찌 보면 역사에 대한 가치평가에 무게중심 없이 흔들리는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에 대한 모순적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여전히 반일(反日)은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가장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강력한 집단 정서로 일제 강점기와 관련된 근대유산에 관한 치우침 없는 역사 해석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입니다.
“일제 때 총독 관사로 지어졌던 청와대 구본관의 철거공사가 오늘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오늘부터 헐리는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구 중앙청, 그러니까 옛 총독부 건물과 함께 지난 54년 동안 일제 식민지 시대의 상징의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북악산의 정기를 끊었던 그곳이었습니다…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한 옛 총독 관사 철거작업은 과거를 씻고 자랑스러운 미래를 건설하자는 이 시대 또 하나의 상징적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3.10.15, KSB News “청와대 구본관 철거공사 시작”
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한 일제 식민지 건축유산의 해체에 대한 근거로 ‘역사의 후퇴’를 언급했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가지 않고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보편적 시대정신’을 통해 꾸준히 앞으로 전진해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는 당시의 맥락적 판단을 통해 최선의 결정을 했을 것이고, 그런 노력들이 쌓여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존재하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대화’라는 영국의 역사학자 카(E.H Carr)의 주장은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역사는 이후 등장한 소수의 권력집단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단죄(斷罪)’될 성격의 것이 아니며, 일시적 사회 분위기에 휩싸여 내린 편향적 해석과 결정은 오히려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수도였던 중국 창춘에도 당시에 세워졌던 상당수의 건물이 멸실되지 않고 재활용되어 사용되고 있고, 지금도 대만 총통의 집무실로 사용중인 타이베이 중심가에 있는 구 대만총독부 청사는 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일제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두 식민지 유산의 보존사례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존중과 인정의 결과이지, 결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아픈 역사에 대한 망각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가해의 역사를 상징하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허물어 온전하게 복원된 경복궁을 얻는 대신 아픈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분명하고 명확한 가해자에 관한 증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 강점기를 겪지 못한 후세들에게 살아있는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리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어 마땅하지만,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저항한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노력과 희생도 포함하는 균형있는 역사적 해석이 여전히 아쉽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함으로써 후세들에게 전해줘야 하는 것은 일본을 향한 무차별적 분노가 아니라, 과거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자행된 과거사를 딛고 당당히 독립된 민주국가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역동성과 인류평화를 추구하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일 것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성찰할 때 우리는 함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후손들이 떳떳할 수 있는 길입니다. 민족정기 확립은 국가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광복 100주년 기념식 연설문 중
역사는 물리적인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하여 잊히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역사가 부끄러워 지워 버린다고 그 역사가 생략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문화유산의 보존을 통해 공유하고 설사 치욕스럽고 아픈 역사라도 가감 없는 해석을 통해 후대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는 교육적 자료로 남겨두는 것이야 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다음 세대를 위해 발휘해야 할 지혜임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의 시선이 아니라, 일제의 통제와 억압의 역사를 극복하고 성공을 일궈낸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일제 강점기의 기억과 현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은 우리 땅에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관련 역사자원의 보존을 통해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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